동계정온고택(桐溪鄭蘊古宅)
경상남도 거창군 취촌면 간천리 50-1
덕유산 남쪽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에는 수승대라는 몇 진 계곡이 있다. 이계곡 에서 4km를 걸으면 강천리 강동마을이 있는데 여기에 멎진 고택하나가 남아있다. 동계 정온의 고택으로 광해군 때 이조참판을 지내고 광해군의 영창대군 처형에 반대하다가 10년간 귀양살이를 하고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항복하는 것을 반대하다 인조가 항복하려 하자 스스로 칼을 배에 찔러 자해를 시도 한 후 낙향하였다. 그의 고택이 동계고택인데 4대손 정희량은 안음에 거주하다 순흥 으로 이사 간 후 1728년 이인좌난에 가담하였다가 거창에서 체포되어 참수되었다.
조선시대 관점으로 보면 이 지방은 역적의 땅인 것이다. 그래서 함양사람들은 안의 송장 하나가 함양 산사람 열을 당한다고 말한다고 한다. 여기서 안의 송장 하나는 안음에서 순흥 으로 이사 한 후 반란을 일으켜 역적으로 처형된 정희량을 말하는 것이다. 조선시대 반란 이란 역사적 사건을 겪었다면 멸문되어 분명 흔적도 없이 사라지거나 폐가 되었어 정상이다. 그런데 정온 선생의 고택은 후손들의 손에 의해 현재까지 이어져 다른 종가나 고택보다 더 잘 보존되고 있다.
알고 보니 이 고택이 지금까지 남게 된 사연이 있었다. 반란에 가담한 역적 안희량이 처형되고 역적의 집안 남자들은 남녀노소 3족을 죽이고 여자들은 관노로 삼는 게 일반적인데 정온선생의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이유로 종손만은 살려주었다 한다. 그렇게 살아남은 후손들이 정온고택을 보존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사랑채 뒤쪽 안채의 마당을 살짝 살펴보니 얼핏 보아도 관리가 참 잘 되어 진 고택처럼 보이는데 아직도 종부가 살면서 매일 같이 청소하고 관리를 한다고 한다.
정온고택은 1920년에 중창해서 오늘날 모습이 되었다고 하는데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남향으로 자리 잡은 정면6칸, 측면2칸 반의 사랑채가 눈앞에 있고 사랑채 뒤쪽에 정면8칸, 측면3간반의 안채가 두 줄로 나란히 서있다. 거창 지역이 남쪽지방이라 북쪽지방에서 주로 사용하는 겹집 형태가 낯 설다. 사랑채와 안채 사이 마당에는 우물이 자리하고 서쪽에는 정면4칸 측면2칸의 곡간이 자리 잡고 있다. 이 지방 고택들의 평면구조로는 참 특이한 구조이다.
마을 분위기는 그저 평범하다. 북쪽으로 수승대라는 멎진 명승지가 자리 잡고 있지만 이집의 분위기는 마을 전체 분위기를 해치는 정도로 화려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부족 한 것 도 없어 보인다. 정온고택 구경을 마치고 돌아 나오면서 동계정온의 4대손 정희량은 왜 목숨을 걸고 이인좌의 반란에 가담했을까? 돌아가면 당시 역사에 대해 자세하게 공부를 해보아야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여행스케치 당간 syston@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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