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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2월 8일 일요일

관음사 (Gwaneumsa Temple, KOREA)

관음사[觀音寺]
제주도 제주시 아라1동 387 T.64-724-6830

제주도에서 유일하게 절다운 절집 관음사는 한라산 중턱에 자리 잡은 대한조계종 23교구의 본산이다. 즉 제주도내 모든 사찰을 관장하는 그런 절집이다. 일반적으로 전국의 명산에는 유명한 사찰들이 몇 개씩 자리를 잡는데 제주도가 섬지역이라 이곳이 한라산에서 유일하게 제대로된 절집이기도 하다. 창건자와 창건연대는 기록이 없어 미상이고 조선 숙종때 제주목사였던 이형상이 제주 잡신을 없앤다는 명목으로 관음사를 폐사시킨 이후 폐허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현재의 관음사는 1912년 비구니 봉려관이 바다에서 풍랑을 만났으나 관음보살의 신력으로 살아나게 되자 이곳에 절을 짓고 불상을 모셨다 한다. 그리고 1948년 제주 4.3 사건으로 다시 전소되었다가 1968년 다시 중창하였다. 이런 역사 때문에 육지에 있는 수많은 천년고찰들과는 분위기 부터가 완전 다르다. 우선 입구부터 제주도 특유의 풍경이 펼쳐진다. 일주문을 통과하면 다른 사찰에 있는 금강문 사천왕이 없다. 대신 100m의 경사로를 따라 제주현무암으로 조각한 똑 같은 크기의 불상들이 도열해 있다. 아마도 이 불상이 사천왕을 대신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 길을 걸어 경내에 들어서면 정면에 대웅전과 몇 개의 전각이 서있는데 모든 건물이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전각들이어서 관음사의 길지 않은 역사를 대변하는 듯 하다. 하지만 이런 어리숙한 풍경도 제주도라는 특수한 지역에서 만나는 절집다운 절집이라 거북하지 않다. 대웅전을 마주하고 제법규모가 큰 연못이 하나 조선되어 있고 그 왼쪽으로 거대한 불상이 야외에 조성되어 있다. 이것도 최근에 만들어진 것으로 절집에 어울리지 않는 규모지만 지역에서 관음사의 세를 파악하기 좋은 불사의 흔적인 것 같다.
 
관음사 오는 길에는 국립 제주대학교가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제주도 최대규모의 국립대학으로 한라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는데 제주 앞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명당이다. 제주대학교에는 건축가 김중엽이 설계한 제주대본관 건물이 있었다. 대학시절 제주도에 와서 실제 건물을 구경한 적이 있었는데 이번에 찾아보니 헐리고 없었다. 어디로 이전 한 것인지는 모르나 한국 건축사에 아주 중요한 건물이 원래 있던 자리에서 사라진 것이 못내 아쉬웠다. 이처럼 사라진 문화유산의 존재는 여간 아쉬운 것이 아니다. 관음사도 오래도록 같은 자리를 지켜 시간이 흐르고 다시 이곳을 찾는 이들 앞에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킬 수 있다면 제주도 유일의 절집으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여행스케치 당간 syston@hotmail.com 



































   

빽담사 (Baekdamsa Temple, KOREA)

백담사[百潭寺]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 백담로 746 T.033-462-6969 / F.033-462-3224

내설악의 중심에 있는 백담사는 역사적으로 우리나라 근현대사에 아주 중요한 족적을 남긴 2명의 인물들과 관련이 있는 사찰이다. 뿐아니라 개인적으로 어린 시절 중요한 추억이 담긴 장소이기도 하다. 강원도 인제에서 한계령 진입로 갈림길에서 진부령 방향으로 길을 잡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용대리 백담사 입구가 나타나고 여기서 부터 다시 비포장 길을 8Km정도 계속을 거슬러 올라가면 만날 수 있다. 과거에는 이 길을 따라 두시간 걷거나 택시나 자가용으로 타고 다녔던 것 같다. 그런데 20년 만에 찾아 보니 국립공원 입구에서 모든 교통수단을 통제하고 편도 2,000원짜리 셔틀버스를 통해서만 백담사 주차장까지 도착할 수 있도록 바꾸어 놓았다. 이 셔틀버스의 운영은 인근 주민들이 하고 있다니 외국의 유명관광지나 국립공원에서나 볼 수 있는 신기한 모습 이다.
 
이렇게 근 20년만에 다시 찾은 백담사는 참 많이 변해 있다. 과거 조그마한 암자에 불과하던 사찰 경내는 넓게 확장되어 여러 전각들이 들어서고 유명사찰들처럼 템플스테이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수익사업을 함께 하고 있다. 20년전 첩첩산중의 쓸쓸하기만 해 보였던 그런 모습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진 것 같아 조금은 씁씁했다. 하지만 백담사 앞을 흐르는 내설악 계속의 모습은 여전한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고 대학생 시절 이 등산로를 따라 봉정암을 거쳐 대청봉까지 이르는 코스를 3차례나 등반한 젊은 시절의 추억이 한참 동안이나 생각나게 한다.
 
만해 한용운의 백담사 사적기에 의하면 서기 647년 신라 제28대 진덕여왕 원년에 자장율사에 의해 한계사로 창건되어 1783년 백담사로 개칭했다 한다. 여기서 우리는 백담사 사적기를 집필한 만해 한용운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만해 한용운 하면 첫 번째로 떠오르는 것이 님의침묵이라는 시구절일 것이다 하지만 만해는 일제 강점기에 불교계를 대표하는 지성으로 항일운동 선봉에 섰던 3.1운동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으로 조선불교청년회를 조직하고 이끌었던 대표적인 항일 독립 운동가였다.
 
그래서 인지 이런 배경을 이해하고 백담사를 바라보면 사찰 모든 분위기가 만해의 흔적으로 뒤덮여 있는것만 같다. 젊은시절 설악산 등정을 위해 백담사를 고속도로 휴개소처럼 둘려보았던 때와 사찰의 내력을 제대로 이해하고 다시 찾았을 때의 느낌은 완전히 다른것이다. 백담사는 원래 큰 절집이 아니였기에 그렇다할 문화재가 남아 있지도 않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사찰에 담겨진 만해 한용운 선생님의 정신과 그의 흔적만 으로도 전체를 압도 하는 느낌이다.
 
또 한사람 전두환 전대통령이 백담사와 관련 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5.18 군사 구테타를 통해 정권을 장악한 후 엄청난 부정축제로 퇴임 후 유죄판결을 받고 복역한 후 사면되어 백담사에서 몇 년간 칩거생활을 하다가 여론이 잠잠해지자 서울 자택으로 귀가한 이력이 있다. 그 이력의 한복판에 등장하는 곳이 백담사이다. 백담사에 서면 기억나는 2명의 흔적이 극명하게 대비되어 한쪽은 그 가치가 더 빛나고 한쪽은 더 추악해 보인다. 훗날 역사가 이렇게 평가할 것을 알았다면 만해의 정신적 향기가 묻어 나오는 백담사는 피해서 칩거 생활을 했을거 같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과거 백담사는 작은 암자 수준이였다. 그래서 더 정겨움이 물씬 묻어 나오는 그런 절집 이였는데 전 대통령의 칩거이후 그 유명세를 타서인지 절집의 규모가 몇 배는 불어난 듯 해 보인다. 사세가 유명사찰 못지 않은 규모로 성장했다. 우리나라 좋은 절집들만 찾아 다니는데 옥에 띠처럼 느껴진다. 백담사를 찾은 시간이 오후4시 한시간 가량 절집 구석구석을 둘러보고 나니 오후5시 해가 서서히 산중턱에 걸리고 있었다. 역광을 받은 백삼사의 모습이 좀 더 신비로와 질 무렵 귀경을 위해 서둘러 백담사를 떠나야 했고 용대리로 나오는 셔틀버스안에서 대학생시절의 소중한 추억을 다시 떠올랐다.
 
여행스케치 당간 syston@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