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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3월 2일 수요일

주실마을(122120)

영양주실마을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

한국은 국토면적이 그리 넓지 않아 어디고 서너 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다. 더군다나 반쪽으로 갈라진 남녁땅은 더 좁아서 가로세로 약 500km를 넘지 않는데 영양은 참으로 오지 중에 오지이다. 지금도 이곳에 가려면 버스를 4시간이상 타야하고 오가는 길도 외통수여서 여간 교통이 불편한 곳이 아니다. 특히나 대중교통을 이용하려면 안동이나 청송을 거쳐야하는 정말 깡촌 중에 깡촌 이다. 영양의 서석지를 구경하러 갔다가 영양 읍내가 궁금해서 들렀고 문 듯 근처의 영양 주실마을이 떠올라 비오느 날씨를 무릎 쓰고 택시를 잡아타고 도착하였다.

이런 깡촌에 언제 다시 올수 있을까 꼭 보고 가야지 하는 마음으로 향한 주실마을은 일월산을 등에 지고 길게 펼쳐져 있는 명당으로 나지막한 구릉에 기와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전형적인 우리네 마을모습이다. 마을의 기원은 약 380년전 기묘사화가 일어 난 후 고향을 떠난 조전은이 서울을 떠나 1630년 경 부터 이곳에 터전을 잡고 정착하였다 한다. 그래서 지금은 한양 조씨의 집성촌이 되었고 오랜 시간이 지나 한국문학에 더 할 나위 없이 중요한 3명의 청록파 시인 중 한명인 조지훈이 이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지금은 주실마을 하면 조지훈 생가가 있는 마을이라 알려져 있으며 실제 그가 태어나고 자란 호은종택이 마을에 남아 있다. 17세기말에 세워진 호은종택은 경상북도 지역의 전형적인 양반가옥으로 6.25전란 중 소실되었다가 1963년 다시 지었다고 한다. 조지훈의 생가가 있는 영양 주실마을은 특별한 문화재 보다 더 의미 있는 곳이 되었다. 또한 주실마을은 안동문화권에 속해 있으면서도 당시의 성리학적 사상을 가장 먼저 변화시킨 곳으로도 유명하다.

이 지역에서 교회가 가장먼저 들어선 곳도 주실마을 이고 1900년대 초 마을전체가 단발을 시행 했을 뿐 아니라 영흥학교라는 근대학교를 세워 신교육에 압장 서고 1911년 노비를 해방하는 등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급진적 변화를 주도적으로 받아 들인 곳이다설명을 듣고 나니 청록파시인 조지훈이 왜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랐는지 이해가 된다문학에 대해서는 잘 아는바가 없지만 비에 젖은 주실마을 뒤돌아 나오는데 저 멀리 보이는 조지훈 문학관이 더 멎 져 보였다.


여행스케치 당간 syston@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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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서석지(122119)

영양서석지[]
경상북도 영양군 입압면 연당리 394-1

경북 안동에서 영양을 가는 버스를 타면 입암면을 지나가는데 이곳에 조선중기에 만들어진 한국 인공정원의 백미 영양서석지가 자리 잡고 있다. 담양 소쇄원과 달리 전형적인 인공정원으로 조성된 서석지는 1613년 광해군 5년 정영방이 낙향하여 영양에 축조하였다. 연못 주변으로는 주일재라는 서재를 만들고 운서헌이라는 현판을 내걸었고 북단에 위치한 서재 주일재는 정면 3칸의 강당있고 서단에는 정면 6칸의 대청과 2칸의 온돌을 갖춘 정자를 세웠다.


연못 한가운데는 한 무더기의 돌무더기가 솟아 있는데 크고 작은 자연석 암반들이 솟아있다. 이 서석군에서 서석지라는 정원의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인공정원을 꾸며놓고도 지반침하로 자연스럽게 솟아 오르는 정원의 돌무더기 하나 하나에 이름을 붙이고 이를 감상했던 주인의 생각을 정원의 이름에서도 느낄 수 있다. 전국에 몇 개 남지 않은 우리 전통 정원의 원형으로 중요한 문화재적 가치가 있는 영양 서적지는 중요민속자료 제108호 지정되어 있다.


서석지가 위치한 마을에는 아직도 사람들이 생활을 하고 있다. 워낙 유명한 문화유산이다 보니 방문객을 위해 마을 앞마당에는 넓은 주차장이 조성되어 있다, 그런데 서석지를 부속정원으로 사용했던 고택에는 현재 아무도 살지 않고 방치해 놓은 것 같아 덩그러니 남은 서석지가 왠지 주인 없는 정원처럼 쓸쓸해 보인다. 중요문화재라 어디서 관리는지 모르지만 비교적 관리가 잘되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사용하지 않고 방치되어 있는 시설처럼 걱정스러웠다. 마을도 워낙 왜진 곳이라 일부러 찾아오지 않는 한 외지인의 발길이 거의 없을 거 같다.


이런 외진곳에 낙향하여 은둔생활을 한 주인도 주인이지만 그렇게 은둔생활을 하면서 이런 멎진 인공정원을 조성해 놓고 즐긴 당시 양반의 사회적 지위도 참 희안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서석지 자체의 문화재적 가치와 미적 아름다움은 논할 필요 없이 당대 최고의 작품이 분명해 보인다. 몇 곳 남아 있지 않은 조선시대 인공정원이여서가 아니라 서석지 자체가 멎진 예술작품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와 대비되는 서민들의 피곤한 삶은 당시 귀족 계층인 양반사회 생활수준에 반비례 했을 것이다.
 
여행스케치 당간 syston@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