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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3월 19일 목요일

화양동서원 (Auditorium of Hwayang-dong, KOREA)

화양동서원[華]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대학생때 였던가 기억이 가물가물 하지만 우암 송시열의 나라라는 책을 보고 내용이 궁금해서 자세히 읽은적이 있다. 노론의 영수였고 유학의 나라 조선 성리학사에 큰 족적을 남긴 우암 송시열은 책 제목에서 보듯 사후에도 조선사회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우암 송시열의 사상과 이상에는 동의하지는 않으나 그가 역사적으로 남긴 영향만큼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국에는 우암 송시열에 관련된 유적이 많이 남아있다. 화양동 서원은 그중에 대표적인 곳으로 서원 자체보다 서원이 위치한 화양구곡이 더 유명한 곳이다.
 
충청북도에 몇 개 되지 않은 문화유적중 그래도 이름이 알려진 곳이기도 하지만 화양구곡은 좋은 계절에는 많은 관광객으로 북적되는 그런 곳이다. 입구부터가 그러했다. 넓은 주차장에 온통 편이시설들이 가득하고 매표소를 지나 화양동 서원까지 오는 동안에도 군데군데 식당이 자리 잡고 있었다. 원래 잘 알지 못하던 곳이였는데 화양동서원을 찾기 위해 화양구곡에 직접 와보니 이런 곳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화양구곡 초입에는 얼핏 보기에도 몇 백년씩된 느트나무들이 군락을 지어 늘어서 있는데 이 또한 압권이다.
 
얼마나 걸었을까 눈앞에 계곡에 제방을 쌓아 물을 가둬둔 작은 호가 보이고 이어서 계곡 옆으로 화양동서원이 자리 잡고 있다. 1695년 숙종21년 노론의 영수 우암 소시열을 제향하고 1969년 사액서원이 되었다. 화양동서원 자리는 송시열이 병자호란때 이곳에 은거 후진을 양성한 곳으로 명의 마지막 황제 의종을 기리며 화양구곡 암각에 대명천지 숭정일월이라는 글자를 새겨 존명대의 근본 도장으로 삼았던 곳이 때문이라 한다. 현재의 관점에서 본다면 우암 송시열의 논리는 참으로 속 좁은 편견에 불과했을 뿐아니라 이 말도 안되는 사대주의 논리에 온 백성이 전쟁의 참화를 겪어야만 했던 정치적 실책이다.
 
조선말 대원군이 서원 철폐령을 내리게 된 계기가 사액서원 화양동서원과 만동묘에 내려진 각종 특혜가 거꾸로 양민들을 핍박하는 수단으로 악용되는 폐단 때문 이였다고 하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1871년 고종8년 노론 사림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원군은 서원을 철폐하는 강경책을 밀어 붙였고 만동묘의 비석은 사라지고 지금 그 흔적만 남아있다. 모든 역사적 사실들이 관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기 마련이지만 우암 송시열의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는 백성을 간과한 정치적 선택 이였고 그 선택은 분명히 문제가 있었다고 이해하고 싶다.
 
여행스케치 당간 syston@hotmail.com 

화양동계곡 느티나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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